앞서 베네토의 프리모로 **리조토 알 네로 디 세피아(Risotto al nero di seppia)**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같은 갑오징어와 먹물을 사용하지만, 파스타나 쌀 없이 하나의 세콘도로 즐기는 **세피에 알 네로(Seppie al Nero)**를 소개한다.
이탈리아어로 *세피아(seppia)*는 일반 오징어가 아니라 몸통이 넓고 안에 단단한 뼈를 가진 갑오징어를 뜻한다. 복수형이 *세피에(seppie)*이므로, 세피에 알 네로는 직역하면 ‘먹물로 요리한 갑오징어’라는 의미다. 현지에서는 **세피에 인 네로(Seppie in nero)**라고도 부른다.
검은색 음식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처음 보았을 때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먹물은 단순히 음식의 색만 검게 만드는 재료가 아니다. 갑오징어 특유의 감칠맛과 바다 향을 더욱 진하게 하고 소스에 깊고 묵직한 풍미를 더한다.
조리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손질한 갑오징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양파와 마늘을 올리브오일에 볶은 뒤 갑오징어를 넣는다. 화이트와인으로 향을 더하고 갑오징어의 먹물을 풀어 약한 불에서 천천히 익힌다. 집에 따라 토마토를 조금 넣기도 하지만, 토마토를 넣지 않고 먹물과 갑오징어 자체의 맛을 살리는 방식도 널리 사용된다.
갑오징어는 너무 짧게 익히거나 어중간한 시간 동안 조리하면 질겨질 수 있다. 센 불에서 재빨리 익히거나, 반대로 약한 불에서 충분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끓여야 한다. 세피에 알 네로는 후자의 방식으로 만드는 요리다. 천천히 익히면 갑오징어가 부드러워지고 먹물 소스도 걸쭉하고 진해진다.
베네치아는 석호와 아드리아해를 끼고 있어 오래전부터 생선과 조개류, 갑오징어를 다양하게 요리해 왔다. 어부들은 갑오징어의 살뿐 아니라 먹물까지 버리지 않고 소스에 활용했고, 이는 베네치아 해산물 요리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세피에 알 네로는 보통 따뜻한 폴렌타와 함께 먹는다. 검고 짭조름한 먹물 소스와 밝은 노란색 또는 베네토에서 즐겨 사용하는 흰 폴렌타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담백한 폴렌타가 진한 먹물 소스를 흡수해 주므로 맛의 균형도 좋다. 실제로 베네치아와 부라노의 전통 식당에서도 세피에 알 네로와 폴렌타의 조합을 대표적인 향토 음식으로 선보인다.
리조토 알 네로 디 세피아가 먹물 소스를 쌀에 스며들게 만든 프리모라면, 세피에 알 네로는 부드럽게 익힌 갑오징어와 진한 먹물 소스를 그대로 즐기는 세콘도다. 검은색 때문에 강렬해 보이지만, 실제 맛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다. 바다의 감칠맛과 은근한 단맛이 어우러진, 베네치아의 환경과 생활 방식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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