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네 에 사바(Pane ’e saba)는 포도즙을 오랫동안 졸여 만든 사바와 밀가루, 건포도, 아몬드와 호두, 향신료를 넣어 만드는 사르데냐의 전통 빵이다.
이름을 그대로 옮기면 ‘사바를 넣은 빵’이라는 뜻이다. 지역과 방언에 따라 빠니 에 사바(Pani ’e saba), 빠니 데 사바(Pani de saba), 빠네 에 사파(Pane ’e sapa)처럼 조금씩 다르게 부른다.
겉모습은 짙은 갈색이나 거의 검은색에 가까우며, 반으로 자르면 촘촘한 반죽 사이에서 건포도와 견과류가 가득 나타난다. 빵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풍성한 재료와 단맛 때문에 일상적인 식사용 빵보다는 케이크나 과일빵에 가깝다.
사바는 무엇일까
빠네 에 사바를 이해하려면 먼저 사바(Saba)를 알아야 한다. 사바 또는 사파(Sapa)는 발효되지 않은 신선한 포도즙, 즉 모스토(Mosto)를 약한 불에서 오랫동안 졸여 만든 진한 시럽이다.
지역에 따라 모스토 꼬또(Mosto cotto) 또는 빈꼬또(Vincotto)라고도 하지만, 발효시킨 포도주를 끓이는 것은 아니다. 포도주가 되기 전의 포도즙을 졸이므로 일반적으로 알코올은 들어 있지 않는다.
포도즙이 처음 양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면 검붉은 색의 걸쭉한 시럽이 된다. 설탕이 귀했던 시절에는 꿀과 함께 음식을 달게 만드는 중요한 천연 감미료였다. 그래서 ‘포도의 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바는 사르데냐뿐 아니라 에밀리아로마냐와 마르케, 움브리아 등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사용한다. 하지만 사르데냐에서는 가을과 겨울의 전통 과자, 제례 음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포도 수확이 끝나면 시작되는 과자
빠네 에 사바는 포도 수확이 끝난 직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담그고 남은 신선한 모스토 일부를 따로 덜어 사바를 만들었다.
사바에는 오렌지 껍질과 계피, 정향, 아니스씨 같은 향신료를 넣기도 했다. 완성된 시럽은 병에 담아 보관했다가 빵과 과자, 튀김과 치즈에 사용했다.
빠네 에 사바 반죽에는 밀가루와 천연발효종, 사바를 넣는다. 여기에 건포도와 아몬드, 호두, 헤이즐넛, 잣을 듬뿍 더하고 오렌지 껍질과 계피, 아니스 또는 정향으로 향을 낸다.
반죽은 재료가 무겁고 당분이 많아 천천히 부푼다. 전통적인 방식에서는 천연발효종을 사용해 오랜 시간 발효했으며, 완성까지 하루 이상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빠네 에 사바는 단순한 빵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 완성되는 축일 음식이었다.
위령의 날과 겨울 축제의 의식용 빵
빠네 에 사바는 특히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과 11월 2일 위령의 날에 만들었다. 사르데냐 일부 지역에서는 이 시기를 ‘이스 아니메다스(Is Animeddas)’, 즉 작은 영혼들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한 음식이나 과자를 받았고, 가정에서는 빠네 에 사바와 빠빠씨니 같은 사바 과자를 준비했다. 수확이 끝나는 계절과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시간이 짙은 색의 포도 시럽으로 연결된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성 안토니오 아바테 축일을 비롯해 마을 수호성인의 날에도 만들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완성된 빵을 성인에게 봉헌하거나 판매 수익을 교회 관리에 사용했다.
누오로 지역 아짜라(Atzara)에서는 11월 13일 수호성인 안티오코 순교자 축일을 위해 빠네 에 사바를 만들었다. 표면이 매끄러운 ‘프라나(Prana)’는 어려운 이웃과 방문객에게 나누었고, 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한 ‘프로리아(Froria)’는 축일 상에 올렸다.
콰르투 산텔레나에서는 성녀 엘레나 축일 행렬 때 식용 금박으로 장식한 커다란 빠네 에 사바 네 개를 성인상 아래에 놓는 전통도 이어진다. 이처럼 빠네 에 사바는 먹는 빵이면서 동시에 감사와 기원, 나눔의 뜻을 담은 의식용 빵이었다.
빵과 케이크 사이의 독특한 식감
빠네 에 사바는 지역과 가정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양하다. 둥근 케이크 모양이 가장 흔하지만 작은 원형이나 타원, 마름모, 고리 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전통적인 빵 형태는 천연발효종이나 맥주효모로 오랫동안 발효한다. 반죽이 촘촘하고 약간 쫀득하며, 사바의 농축된 포도 맛과 향신료 향이 진하게 난다.
구운 뒤에는 표면에 사바를 여러 번 발라 윤기를 낸다. 아몬드와 호두로 꽃이나 십자가 문양을 만들고, 작은 색깔 설탕이나 식용 금박을 올려 축일에 어울리게 장식하기도 한다.
사바 덕분에 빵은 쉽게 마르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향신료와 건과일의 맛이 반죽에 더욱 깊이 스며든다. 갓 구웠을 때보다 하루나 이틀 지난 뒤 맛이 안정되는 경우도 많다.
‘파투 에 코투’와 무엇이 다를까
빠네 에 사바와 비슷한 과자로 ‘파투 에 코투(Fattu e cottu)’가 있다. 이름은 ‘만들어서 바로 굽는다’는 의미이다.
빠네 에 사바가 효모나 천연발효종으로 오랫동안 발효시키는 빵이라면, 파투 에 코투는 화학 팽창제를 사용해 반죽을 만든 뒤 비교적 빠르게 굽는다. 식감도 빵보다는 부드러운 케이크에 가깝고 설탕에 절인 과일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현대 제과점에서는 두 이름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거나 조리법이 서로 섞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구분에서 빠네 에 사바는 발효의 시간과 빵의 질감을 지닌 음식이다.
가난한 빵이 아니라 수확을 나누는 빵
빠네 에 사바는 흔히 농촌의 소박한 빵으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견과류와 건포도가 풍성하게 들어가는 귀한 축일 음식이었다. 집안 형편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의 양과 종류가 달랐고, 사바의 재료에도 차이가 있었다.
포도로 만든 사바가 가장 귀했고, 무화과나 선인장열매, 산딸기나 아르부투스 열매로 만든 시럽도 사용했다. 과거에는 야생 열매로 만든 사바가 가난한 사람들의 대용품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희귀한 지역 특산품이 되었다.
빠네 에 사바는 얇게 잘라 에스프레소나 따뜻한 차와 함께 먹으면 좋다. 모스카토와 말바시아 같은 디저트 와인, 또는 숙성 페코리노 치즈와도 잘 어울린다.
포도 수확의 단맛을 시럽으로 저장하고, 그 시럽을 빵에 넣어 세상을 떠난 사람과 살아 있는 이웃에게 나누었던 빠네 에 사바. 짙은 색 반죽 안에는 사르데냐의 포도밭과 가을, 축일과 공동체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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