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요리

빠네 네로 디 까스텔베트라노(Pane nero di Castelvetrano), 고대 밀 투미니아로 만든 시칠리아의 검은 빵

corita40019 2026. 7. 29. 22:30

 

시칠리아 길거리 음식에 이어 이번에는 시칠리아의 빵을 하나씩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 빵은 트라빠니 지방의 **빠네 네로 디 까스텔베트라노(Pane nero di Castelvetrano)**이다.

이름을 직역하면 ‘까스텔베트라노의 검은 빵’이다. 처음에는 오징어 먹물이나 숯가루를 넣은 빵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 빵의 어두운 색은 인위적인 색소가 아니라 시칠리아의 고대 듀럼밀인 **투미니아(Tumminìa)**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빵 전체가 새까만 것은 아니다. 잘 구운 겉껍질은 짙은 커피색을 띠지만 속살은 황금빛과 갈색이 섞인 호박색에 가깝다.

시칠리아 서부 까스텔베트라노의 빵

까스텔베트라노는 시칠리아 서부 트라빠니 지방에 있는 도시이다. 올리브와 고대 곡물 재배로 유명한 벨리체 계곡과 가까우며, 이 지역에서 재배한 듀럼밀로 만든 검은 빵이 오랫동안 주민들의 일상적인 식량이 되어왔다.

전통적인 빵에는 시칠리아 듀럼밀 세몰라와 투미니아 통밀가루를 섞어 사용한다. 곡물은 자연석 맷돌로 거칠게 갈고, 시칠리아어로 **우 크리셴티(u criscenti)**라고 부르는 천연 발효종을 넣어 천천히 발효시킨다.

반죽은 둥근 빵인 **바스떼다(vastedda)**나 소의 발처럼 보이는 꿋두라(cuddura) 형태로 만든다. 표면에는 시칠리아에서 ‘치미노(cimino)’라고도 부르는 참깨를 넉넉히 뿌린다.

전통적으로 올리브나무를 전정하고 남은 가지를 태운 석조 가마에서 굽는다. 강한 열로 형성된 두꺼운 커피색 껍질과 참깨의 고소함, 장작불의 구운 향이 빵의 중요한 특징이다. 시칠리아 전통 방식

검은색을 만드는 투미니아 밀

투미니아는 **티밀리아(Timilia)**라고도 불리는 시칠리아의 오래된 듀럼밀 품종이다. 봄에 파종해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수확하기 때문에 ‘마르주올로’, 즉 봄에 심는 밀이라고도 불렸다.

이름은 3개월 주기의 곡물을 뜻하는 그리스어 trimenai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운 날씨와 건조한 환경에 잘 적응해 과거에는 시칠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에서 널리 재배되었다. 슬로푸드 투미니아 자료

투미니아의 낟알은 일반적인 밀보다 색이 짙고 단단하다. 이를 겉껍질까지 포함해 돌로 갈아 넣기 때문에 빵의 색이 어두워지고, 구운 곡물과 견과류를 연상시키는 진한 향이 난다.

‘검은 빵’이라는 이름은 현대의 흑미빵이나 숯가루 빵처럼 속이 새까맣다는 뜻이 아니다. 짙은 곡물가루와 장작가마에서 구워진 두꺼운 껍질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라질 뻔했던 지역의 빵

산업화된 흰 밀가루와 빠른 제빵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투미니아를 재배하고 자연 발효종과 장작가마로 빵을 만드는 전통은 한동안 크게 줄었다.

까스텔베트라노의 제빵사와 생산자들이 전통을 되살리고 투미니아 재배와 석재 제분을 이어가면서 이 빵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빠네 네로 디 까스텔베트라노는 시칠리아의 전통 농식품인 PAT에 등록되어 있으며, 고대 곡물과 지역 제빵 문화를 보존하는 대표적인 빵으로 알려졌다.

슬로푸드 프레시디오는 한때 생산자가 한 곳만 남으면서 운영이 중단되었고, 최근 지역 슬로푸드 조직은 여러 제빵사의 참여를 다시 모아 프레시디오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현재의 슬로푸드 프레시디오’라고만 소개하기보다는, 슬로푸드가 오랫동안 보존해 온 빵이자 현재 지역 공동체가 보호 체계를 재정비하고 있는 전통으로 설명하는 것이 정확하다. 슬로푸드 2025–2029 활동 계획

맛과 식감은 어떨까?

빠네 네로 디 까스텔베트라노는 가볍고 커다란 기공이 생긴 현대식 사워도우와 성격이 다르다. 속살은 비교적 촘촘하고 촉촉하며 씹을수록 듀럼밀 특유의 단맛이 느껴진다.

투미니아에서는 구운 곡물, 견과류와 몰트를 연상시키는 향이 나고, 두꺼운 껍질에서는 장작불과 참깨의 고소한 풍미가 느껴진다. 천연 발효종을 사용하지만 산미가 지나치게 강한 빵은 아니다.

큰 덩어리로 굽고 수분을 충분히 머금고 있어 쉽게 마르지 않으며 며칠 동안 보관할 수 있다. 오래된 빵은 브루스께따나 수프에 넣거나, 올리브오일과 토마토를 곁들인 빠네 쿤자또로 활용하기 좋다.

시칠리아에서는 어떻게 먹을까?

갓 구운 빵은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과 소금만 곁들여도 충분하다. 까스텔베트라노 지역의 노첼라라 델 벨리체 올리브로 만든 향긋한 올리브오일과 특히 잘 어울린다.

토마토, 오레가노, 안초비와 치즈를 올려 빠네 쿤자또로 먹거나, 살라미와 뻬꼬리노를 곁들이기도 한다. 조직이 단단해 구운 채소나 카포나타처럼 수분이 있는 음식과 함께 먹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응용하기

한국에서는 투미니아 가루를 구하기 쉽지 않다. 투미니아 없이 만든 빵을 정통 빠네 네로 디 까스텔베트라노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듀럼밀 세몰라와 통밀가루를 섞으면 특유의 단단한 조직과 구수한 풍미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가장 현실적인 배합

  • 고운 듀럼밀 세몰라 리마치나타 70~80%
  • 통밀가루 20~30%
  • 사워도우 발효종 또는 소량의 이스트
  • 물, 소금, 참깨

세몰라 리마치나타를 구하기 어렵다면 고운 듀럼밀가루와 강력분을 섞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굵은 세몰리나는 입자가 커서 그대로 사용하면 반죽이 거칠어질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빵과 파스타 반죽용으로 곱게 재제분한 세몰라 리마치나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색과 구수한 향을 보충하고 싶다면 통호밀가루를 전체 가루의 5~10% 정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호밀의 비율이 높아지면 시칠리아 듀럼밀빵보다 북유럽식 흑빵에 가까워진다.

먹물, 코코아, 흑임자나 식용 숯가루로 검은색을 만드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색은 비슷해질 수 있지만 투미니아에서 나오는 구운 곡물 향과 빵의 성격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재료와 곁들이기

빠네 네로 디 까스텔베트라노풍 빵은 한국의 식재료와도 잘 어울린다.

  • 들기름이나 향이 부드러운 참기름과 소금
  • 토마토와 모차렐라 또는 생치즈
  • 구운 가지와 파프리카
  • 멸치나 앤초비 페이스트
  • 불고기나 수육을 얇게 올린 오픈 샌드위치

다만 참기름의 향이 강하면 곡물과 참깨의 풍미를 덮을 수 있으므로 소량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정통에 가까운 맛을 먼저 보고 싶다면 올리브오일, 토마토, 소금과 오레가노만 곁들이는 것이 가장 좋다.

만들 때 주의할 점

통밀가루의 색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일반 통밀가루로 만든 빵은 투미니아빵과 색이 완전히 같지 않다. 억지로 검게 만들기보다 듀럼밀의 고소한 향과 촘촘하고 촉촉한 조직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

세몰리나의 입자를 확인한다

굵은 세몰리나는 물을 천천히 흡수하고 반죽의 연결을 방해할 수 있다. 굵은 제품만 있다면 전체 가루의 일부만 사용하거나 미리 물에 불린 뒤 넣는다.

물을 한꺼번에 넣지 않는다

투미니아와 통밀가루는 제분 정도와 겨의 양에 따라 흡수하는 물의 양이 크게 달라진다. 처음에는 예상량의 85~90%만 넣고, 반죽 상태를 보면서 나머지를 추가하는 것이 안전하다.

가루와 물을 먼저 섞어 30분 정도 두는 오토리즈 과정을 거치면 거친 통밀가루도 수분을 충분히 흡수한다.

큰 기공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

이 빵은 원래 속살이 비교적 촘촘한 빵이다. 기공이 작다고 해서 발효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발효를 지나치게 길게 하면 힘이 약한 통밀 반죽이 퍼지고 신맛만 강해질 수 있다.

장작가마 대신 높은 예열 온도를 이용한다

가정용 전기오븐은 전통 석조 장작가마의 열과 향을 그대로 재현하기 어렵다. 무쇠냄비나 피자스톤을 넣고 오븐을 최고 온도로 충분히 예열한 뒤 구우면 두꺼운 껍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초반에는 증기를 주거나 뚜껑을 덮어 굽고, 후반에는 증기를 빼고 충분히 구워 짙은 갈색 껍질을 만든다. 겉색만 보고 너무 일찍 꺼내면 묵직한 속살이 덜 익을 수 있다.

빠네 네로 디 까스텔베트라노는 단순히 색이 어두운 통밀빵이 아니다. 투미니아라는 고대 밀, 자연석 맷돌, 천연 발효종과 올리브나무 장작가마가 함께 만들어낸 지역의 역사이다.

시칠리아 빵 시리즈의 시작으로 이 빵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덩어리의 빵 안에 시칠리아의 밀밭과 올리브나무, 오랫동안 곡물을 지켜온 농부와 제빵사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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